「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이태석 신부, 생활성서사, 2010)



몇 달 전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이태석' 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사제이자 의사로서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에서 살다가 2010년 1월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쯤에서 또 다시 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은 어째서 나와 쥐를 놔두고 이태석 신부를 데려가신 걸까?

'하나님은 예뻐하는 자일수록 빨리 데려간다' 고 누군가가 그랬다. 그는 그래서 사랑했던 누가 죽어도 슬프지 않단다. 구순의 나이에도 아직 팔팔해서 농사도 짓고 소도 키우는 저기 어딘가의 누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그는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나이가 60세를 훌쩍 넘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의 생은 더 큰 뜻을 위한 도구였으며 죽음은 그 과정의 일부이다' 라는 좀 더 그럴듯한 대답이 있을 수 있다. 더 큰 뜻, 좋다. 하지만 인류는 이미 2000여 년 전에 예수를 목격했음에도 여전히 '이러고 있다' 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과거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자청했던 자들의 인류에 끼친 해악에까지 생각이 이르면 이 답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금방 알게 된다. 예수가 있었거나 없었거나 착할 놈들은 착하고 못될 놈들은 못된다. 내가 너무 삐뚤어졌나? 그 날 내가 본 프로그램에 의하면, 이태석 신부의 죽음 이후에 톤즈 아이들에게로의 지원이 뚝 끊겼다. 아이들은 눈 앞의 한 끼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희망으로 반짝거리던 아이들의 눈에 가득한 눈물을 보고 있으려니,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생각이 다시금 꿈틀대기 시작했다. '내가 믿는 신은 사디스트인가 보다.'

'도구'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이야기해야겠다. 하느님은 왜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불치병 혹은 신체·정신적 장애로 고통받게 하는가? 이 의문에 엽기적인 대답을 한 자가 있었다. 그에 의하면, 그러한 이들 또한 하나의 도구로, 그러한 고통 없이 세상을 사는 자들로 하여금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나눔과 보살핌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 


헛소리 그만하고 이제 나의 답을 쓰겠다. 간단하다. 이 우스꽝스러운 의문과 답들에서 신을 제거하면 된다. 이태석 신부는 단지 한국인의 3대 사망 원인 중 하나인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뿐이다. 인류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했을 것이다. 쥐는 고른 영양 섭취와 최신 의학의 도움으로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사한 얼굴빛을 자랑하고 있다.  나는 비록 고른 영양 섭취를 하진 못하지만 하루 30분씩 스트레칭을 하며 건강을 도모하고 아프면 째깍째깍 병원에 간다. 조금 예민한 성격으로 스트레스를 잘 받지만 기억력이 좋질 못해 다음 날이면 어제 내가 무슨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불치병 혹은 장애로 고통 받는 이들은? 그것은 유전학자 혹은 기타 의학자들에게 물어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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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는 얘긴 아니다. 성당에는 잘 나가지 않지만.

그리고 책 얘기: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이는 군더더기 없는 글을 쓴다. 그래서 그런 글을 볼 때면 나는 자꾸만 어디로 숨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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