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좌파」(김규항, 야간비행, 2001)

 

 

김규항. 스스로를 B급이라 칭하고 세상과 불화하는 자. 저자에 대한 상당한 호감을 갖고 책을 집어 들었지만,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내가 B급 좌파에게서 보길 원했던 것은 탁월한 통찰이나 번득이는 재기이지 도덕적 근본주의 따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게 김규항은 B급이 아니라 일반적인, 너무도 일반적인 좌파다.

 

 

 

 

 

 

「나는 왜 불온한가」(김규항, 돌베개, 2005)

 

 

《나는 왜 불온한가》는 《B급 좌파》에 이은 두 번째 칼럼집으로, 2001년부터 2005년까지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더니 꽤 읽을만 했다. 나름 재밌게 읽었다. '나는 왜 불온한가' 라는 물음은 나르시시즘적인 면이 있어 좀 우습긴 하지만(니체의 물음이 떠오르지 않는가). 무튼, 개인적으로는 한국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이 마음에 들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관하여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에 거슬리는 '모순된 주장' 한 가지를 지적해야겠다. 우선, 2001년 12월 6일의 글(p.45)을 보자.

 

(······) 1872년 마르크스는 자신이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터내셔널의 갈등을 보다 못해 결국 해산에 이르게 한다. 만일 내로라하는 국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그 갈등이, 외피처럼 단지 정당한 견해의 충돌이었다면, 토론과 논쟁을 통해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마르크스는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견해의 충돌을 외피로 하는 그 갈등의 내용 속에 보편적인 인간적 충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질투, 욕심, 음모, 폭력 등 인간의 모든 악한 행동의 근원이자 어떤 숭고한 정신 속에도 능히 암약하는 인간의 본능적 이기심문제다. 어이 없는 얘기지만, 현실 사회주의가 '사회주의가 아닌 것'으로 귀결한 원인 또한 대개 거기에 있다. 이기심은 억압과 싸우는 상황보다는 억압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마련된 강력한 정부는 바로 그 강력함 덕분에, 그 정부를 이루는 인간들(빛나는 혁명 이력을 가진, 그러나 역시 결점을 가진 인간인)의 이기심을 고양시킨다. 강력한 혁명성과 폭발하는 이기심의 간격은 결국 비극을 낳는다(글의 뒤에서 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인민의 정부에 대한 인민들의 견제력'을 제시함)

 

이어지는 글은 2002년 6월 10일의 글(p.88)이다.

 

흔히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른바 서구식 문명을 등진 소수 부족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아예 이기심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있습니다. 이기심 가운데 상당 부분은 본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길러진 사회적 습성일 뿐입니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주장은 대개 사람이 본능적으로 보수적이라는 주장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기에 함께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는 건 본디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님은 그게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겁니다. (중략) 사람은 오히려 본능적일만치 진보적입니다.

 

저자는, 어떻게 불과 6개월 만에 인간본성에 관한 견해를 180도 바꾸게 된 것일까? '이기심 가운데 상당 부분'이라는 구실을 달아 두긴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기심에도 종류가 있나? 인간본성에 관한 문제는 정치철학의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다. 그에 관한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정치 스펙트럼 상의 내 실존적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 혹은 변혁을 꿈꾸는 진보주의자는 기본적으로 인간본성을 낙관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낙관 없이, 어떻게 '변화'를 꿈꾸겠는가? 현실 사회주의가 이상(理想)과 괴리(乖離)된 방향으로 귀결된 것에 대한 원인을 인간본성의 '본질적 어두움 에서 찾는 것은, 그러므로 이상주의자로서의 자살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현실주의자 혹은 보수주의자의 수사(修辭)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