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
posted Life in mono 2013. 3. 27. 01:08

 

 

 

 

 

이 엽서를 쓴 친구에 의하면 당시 나는 나의 답장을 기다리며 피말라 죽어가는 친구에게 거짓말을 둘러대며 답장하기를 미루었다. 그리고 음악 가창 시험을 앞두고 있었으며, 평소 좋아하던 J의 옆에 앉지 못하고 다른 아이의 옆에 앉았다.

 

친구의 주장대로 내가 답장을 쓰지 않고서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집에 두고 왔던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진짜로 집에 두고 왔을 확률이 높다. 그 때나 지금이나 덤벙대는 건 변하지 않았으니까. 음악 가창 시험은 망쳤던 기억이 난다. 고음 부분에서 음이탈을 했다. 노래를 하다 하필이면 J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J는 그 해 겨울에 다른 고장으로 전학을 갔는데, 그 뒤로 쭈욱 소식을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대학 1학년 때 캠퍼스에서 다시 만났다. 겨울이 깊어가기 직전의 어느 날이었다. 같이 밥을 먹고, 바람에 낙엽이 굴러다니던 교정을 걸었다.

 

다시 중학생 시절로 돌아가, 옆짝 배정에 관한 얘기를 좀 해야겠다. 정말이지 우스꽝스러운 자리 배정 방법이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는 매월 모의고사라는 걸 봤다. 그리고 그 점수에 의해 철저히 서열화 되어졌다. 자리 배정법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모의고사 점수가 나온 날 아침, 학생들을 모두 교실 앞으로 나오게 한다. 그리고 남학생들 먼저 등수대로 앉고 싶은 자리에 가 앉는다. 옆자리는 비워 두고 말이다. 남학생들이 다 앉고 나면, 여학생들이 1등부터 차례대로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남학생의 옆에 가 앉는다. 1등을 한 여학생은 모두가 선망하는 훈남의 옆에 앉을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꼴등을 한 여학생은 모두가 기피하는 찐따-_-의 옆에 앉을 확률이 높아진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학생이 몇 등인지 그리고 모의고사 점수가 몇 점인지까지도 모두가 알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월마다 선택의 주체는 바뀐다. 이번 달에 남학생이 앉아 있고 여학생이 선택을 했다면, 다음 달에는 여학생이 앉아 있고 남학생이 선택하는 식이다)

 

물론 변수는 있었다. 우선 나처럼 소심한 개체는 좋아하는 아이 옆에 앉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누군가의 옆에 앉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나는 J의 옆에 앉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A의 옆에 앉고 말았다. J의 옆에는 B가 쏜살같이 달려가 앉았다. B는 예쁜 얼굴에, 활달한 성격을 가진 아이였다. 자리 배정 이후로 그 둘은 급속히 친해졌다. 나는 그 날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엽서를 통해 볼 때, 나는 그 날의 선택에 대한 후회 역시 내색하지 않으려 했음이 분명하다.

 

다른 변수로 '의리' 를 들 수 있겠다. 공인된 커플의 경우 이 '의리' 로 인해 함께 앉을 확률이 높아진다. '무언의 압력' 그리고 '동조' 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위의 엽서를 쓴 친구와 C 또한 공인된 커플이었고, 때문에 모의고사 점수에 상관없이 오랫동안 짝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무언의 동조' 를 깨고 공인된 커플 한 쪽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개체 또한 있게 마련, 이 우스꽝스러운 자리 배정은 그 때부터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는 스펙터클한 잔혹극이 된다.

 

내 얘기를 하자면, 나는 그 이후로 A와 무언의 커플(?)이 되었다. 다음 달 내 옆 자리에 A가 와서 앉았던 것이다. 그 다음 달엔 어떻게 되었냐고? 이상하게 그 뒤부터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란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니까.

 

J와 함께 있었던 그 날의 기억도 그렇다. 그 날의 J는 내게, 허공으로 흩어지는 웃음 소리 혹은, 겨울 입구의 스산한 바람 소리다. 재밌지 않은가? 그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이 온통 소리들 뿐이라니. 그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표정을 했었는지, 어떤 말을 했었는지는 모두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순간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내가 한때 좋아했던 J는, 형체없는 소리로 남았다.